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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두 통

기사승인 [204호] 2020.02.17  10: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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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중에 문자가 떴다. 청첩장이다. 추근대더니 이제 떨어졌네, 했다. 시원섭섭한 마음을 죄 내려놓을 순 없겠다. 임 팀장이 올 초, 홍보부서로 오고부터 한 달에 두 번 티타임을 갖곤 했다. 임 팀장은 부서원들도 느낄 만큼 내게 관심을 표명했다. 추행이니, 하는 따위는 아니었지만 일면 작업이라 여기기에 충분할 만큼 추근댔다. 3년째 업무계약 체결을 한 프리랜서였다. 번역원(대한번역개발원)이나 에이전시에 소속되지 않은 아랍어 번역사로 나름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증표이기도 했다.

납기일을 3∼4일 어길 때면,

-최 선생님, 피로감 만땅이지요. 차 한 잔 어때요.

라며, 전화하곤 했다. 임 팀장의 그런 제의가 갑을 관계로만 여겨지지 않았고, 친절했다.

-이번 기사, 반응 좋네요.

전해 왔고,

-내가 더 즐거웠어요.

라며, 응대하기도 했다.

홍보지 발간 뒤면 갖는 술자리 역시 1차 이후 입가심 맥줏집까지 자연스레 이어지곤 했다. 3차로, 한 잔 더 하자고 붙잡는 걸 겨우겨우 떼어내고 돌아오면 새벽녘인 때도 수차례였다. 임 팀장의 액션에 흔들리는 모습을 내보인 적이 전혀 없진 않았다. 하지만, 업무 관련 이상으로 진전시키지 않으려 애써 거리를 두곤 했다. 임 팀장은 짐짓 놀라며 아쉬운 듯하면서도 더는 들이대진 않았다. 한 걸음 더 다가왔으면 그에게 기울어졌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머리를 감쌌다. 납기일을 일주일째 넘기고 있다. 결코 없었던 경우다.

‘차 한 잔’ 하자는 연락도 없던 차에, 청첩장이라니…. 이래저래, 헷갈렸다. 영업팀에서 새로운 루트를 뚫어 맺는 계약 문건이었다. 계약 문건은 1급 문서로 처음 맡는다. 이렇듯 정교한 문서의 최종 번역은 해당국 언어의 전공교수나 그에 버금가는 라이센스를 가진 번역사들이 도맡아 왔다.

중동지역 여행 허브 국가인 UAE의 항공사와 여행상품 소개, 특정 지역의 흥밋거리 등을 회사 홍보지에 싣기 위한 1차 번역 작업이 업무였고, 대체로 최종 마감했다. 실력 인정으로 여겨 고무된 느낌까지 가졌으나, 뭘까? 하는 의구심 또한 내려놓지 못했다. 작업은 더뎠다.

일감이 계속 줄어드는 상황이다. 전업인 까닭에 일감의 부재는 궁핍한 생활로 이어진다. AI(인공지능) 시대의 전면적 도래에 이르진 않았다손 해도 번역업계의 1차 작업은 구글 최신번역기로 대체된 지 꽤 됐다. 사실, 1급 문서를 의뢰받고는 들뜸보다 뭔가 모를 찜찜함이 턱 솟고라지는 거였다.

일주일이나 납기일을 어기는 건 이 바닥에선 계약의 효력 상실을 의미했다. 번역원이나 에이전시 소속 번역사는 넘쳐났고, 경쟁은 치열했다. 3∼4일 납기일을 어긴 적이 몇 번 있었음에도 일감을 줄곧 내준 건 회사의 배려였다. 회사에 대한 신뢰도 그만큼 쌓였고 임 팀장에 대해서도 한편으론 고마움을 떨구지 못하던 터다.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한 모금 들이키며 창밖 어둠을 응시했다.

어둠 저 편엔…,

일감의 가뭄 끝엔…,

상상을 깨며 문자가 또 날라 왔다. 업무계약 해지 통보였다. 이 밤중에, 트럼프스럽게…, 푸른 가로등이 더욱 푸르딩딩해 보였다.

한상준 72109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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