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지면관계상 2회로 나눠서 연재한다. 

 

첫번째 이야기

2019년 8월경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이른바 ‘ 조국 사태’를 계기로 교육의 형평성 논란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한 장의 봉사활동 표창장이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모순을 감추고 있었던 판도라 상자를 열어젖힌 것이다.

지난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 기회는 평등할 것이다. 과정은 공정할 것이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라고 선언했으며, 일본 대학생들과의 대화에서 ‘왜 한국인들은 대규모 시위를 자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여 이낙연 총리는 ‘한국인은 공정함과 정의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명제를 증명하는 유명한 사례들이라고 하겠다. 그렇다. 우리 국민 개개인은 각자가 주인임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살아가야하는 민주공화국체제 하에 놓여있다.

그런데 모든 문제는 민주공화국이 성립하기 위한 두 가지 전제조건인 자유와 평등이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자연스런 상태에서는 수많은 자유에 대한 욕구들이 서로 간에 갈등이나 충돌 없이 평등하게 실현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교육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개인사( 個人史 )를 중심으로 파헤쳐보고, 불평 등할 수밖에 없는 교육현실을 살펴본 뒤, 이를 해소하고 사회적 합의에 이르는 바람직한 해결책을 고민해보고자 한다.

삽화 1. 아버지의 가르침

아버지는 부농( 富農 )과 중농( 中農 )의 중간쯤 이었다. 임야 10정보, 전답 5정보를 소유하고 머슴 2명을 고용하고 있었다면 농사규모가 짐작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재산은 본인노력의 결과도 보태졌겠지만, 대부분은 6.25전쟁당시 일가족이 빨치산에 의해 일시에 희생당한 작은 종조부 가족(내게로 5촌 당숙들)의 유산이다. 어찌되었든 그 덕분에 우리 집 10남매는 끼니와 학비 걱정을 해본 적은 없다. 아버지의 학 력은 일제강점기에 보통학교와 농사전문학교 합해서 3년 정도 다닌 것이 전부이다. 어떤 부모나 그러하듯이 내 아버지도 자신이 배우지 못했던 한을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로 풀려고 했다.

나의 초등학교 입학을 전후해서 아버지는 나에게 한글과 천자문, 구구법과 주판셈, 60갑자, 바둑과 장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한겨울 이불속에서 선조들의 함자와 산소위치, 조선조 27대 임금 이름을 순서대로 외워야했고, 전라북도에 소재한 12개 시군과 고창군에 소속된 14개 읍면 명칭도 모두 기억 해야했다.

이렇듯 국어, 산수, 역사, 지리 및 잡기 등 아버지는 본인이 갖고 있던 지식의 총량을 아들인 내 머릿속에 주입시켰다. ‘남자는 도둑질만 빼고 모든 것을 다 할 줄 알아야 한다.’ ‘곳간 속 의 재물은 누가 훔쳐갈 수 있어도 머릿속의 지식은 못 빼앗아간다.’ 이런 훈시들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그러면 아버지의 조기 영재교육(?)의 효과는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 반장을 맡는 등 공부를 잘하는 아이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고학년이 될수록 수동적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져 자기주도적 학습능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이후 고3때까지 한 번도 반성적 1등이나 반장을 해본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무엇을 위해 배워야하는지를 뚜렷하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면 남부러워하는 벼슬을 할 수 있고, 그러면 부귀영화가 자동적으로 따라오며, 그래야 부모에 효도하고 가문을 빛낼 수 있다는 정도가 무언의 가르침이었던 것 같다.

이웃을 사랑하고 사회에 봉사하며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국제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라는 등의 거창한 말씀은 없었다. 아버지의 세계는 가족과 가문 밖으로는 확장되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있었다고 짐작된다.

그 대신 나에게 철저한 예의범절을 주입시키고 엄격한 상벌을 내렸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한 번도 따뜻한 부성애를 느껴본 적이 없고 지금도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립거나 고맙지가 않다. 나에 대한 아버지의 교육은 훗날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투자였다라고 생각하는 나는 불효자인가?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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