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라면 3] 정숙인 소설가

 

퉁퉁 불은 라면을 먹어본 적 없는 사람은 라면의 맛을 말할 수 없다. 80년대의 라면은 누구에게든 쉽게 접할 수 있는 맛이기도 했지만, 특별한 기억이 되기도 한다. 여느 가정의 밥상에서, 자취집 연탄아궁이 위에서 팔팔 끓여졌고, 학교의 석탄난로와 대학 연극반의 석유난로 위에서 고소하게 구워졌다. 한밤, 어떤 부식거리도 라면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응답하라 1988’은 대한민국에 80년대의 기억을 소급시키기도 했다. 올림픽 개최국으로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의 하계 올림픽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을 때였다. 1988년 당시의 대학 연극반 선배들은 나와 동기들에게 ‘팔팔 꿈나무’라 부르길 좋아했다. 연극은 내게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이었다. 국어시간이면 선생님은 내가 손을 들지 않아도 당연한 것처럼 나를 호명했다. 덕택에 장르를 가리지 않고, 습관처럼 낭독의 기미가 보일 때마다 가슴이 설렜다. 중학교에서는 연극반 특활을, 고등학교에서는 축제마다 한 달씩 준비한 연극을 무대에 올렸고, 나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니 대학에서는 기다릴 것이 없었다. 오디션이 있기 전부터 연극반 반실의 문을 두드렸다. 연극반 신입 오디션을 마치고, 동기들에게서 내가 선배 인줄 알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대학 연극반에서는 신입생 환영 공연으로 2학년 선배들의 공연이 있었고,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공연은 봄 공연부터 가을 공연까지였다. 연극론, 연기론, 조명론까지 중, 고교와 다르게 선배들의 가르침은 공연을 위해 갖춰야할 기본 소양이었다. 무엇보다 하루도 빠지지 않는 것은 신체훈련과 얼 차례였다. 학생회관 앞 큰 로터리에 ‘엎드려뻗쳐’를 시켜두고 동기간의 우정이나 의리라며 무대 위에서 가질 수 있는 자신감, 면피를 할 최고의 훈련이라고 가르쳤다. 팔팔 꿈나무였던 연극반 동기들과 눈물 젖은 라면을 먹던 때도 1988년이었다.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그렇다. 그때 연극반에서의 체벌은 가끔 일어날 수도 있는 흔한 일 같은 것이었다. 지금은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으면 한다.

 

어느 날인가 봄 공연 연습 중, 스텝을 맡은 동기들이 라면 스무 개쯤을 큰 솥에 끓여왔다. 연습은 자정을 넘고, 지하 공연장은 이미 추위로 치아가 덜덜 떨릴 정도였다. 무대 위의 배우들은 라면 솥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살았다, 저걸 저대로 먹을 수는 있을까?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연출을 맡은 선배는 우리의 마음을 알까? 알겠지? 제발! 어서, 우리에게 라면을! 라면 솥이 들어오고도 십 분, 이십 분, 삼십 분. 다시, 다시, 수없이 다시, 그래 그 부분은, 그 감정이야아, 아니, 거기서 그러면 어떡해! 한 시간이 지났다. 배고픔과 추위에 아랑곳 않는 저 열정은 연출만의 몫. 아, 미운 선배, 나쁜 연출! 우린, 그날의 퉁퉁 불어 참 경제적인 국물 없는 라면을 기억한다. 객석에 라면 솥을 두고, 우리는 처연하고 경건하게 ‘엎드려뻗쳐’를 하고서야 가락국수처럼 불은 라면을 무척이나 감사해하며 먹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서도 라면은 맛있었다.

 

동기야, 그 라면 맛 기억나니? 단톡방에 문자를 남긴다.

정숙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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